[실미도684부대 시리즈 2부] (12) 죽은 자와의 대화… 실미도 684부대 훈련병 임성빈

김명수기자 | 입력 : 2010/11/03 [13:40]
[실미도684부대 시리즈 2부] (12) 죽은 자와의 대화… 실미도 684부대 훈련병 임성빈 
 
 임성빈. 날렵하기가 호랑이 같이 민첩하고 상대할 적수가 없을 정도로 싸움을 잘해서 비호(飛虎)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실미도 684부대 훈련병이었다.

▲ 1968년 4월 실미도에 끌려가기 전의 실미도 684부대 임성빈 훈련병. 23살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실미도에 끌려가기 전에 찍은 기념사진으로 유가족으로부터 어렵게 입수했다. 멈춰버린 40여년 세월만큼이나 실금이 가고 빛이 바랜 사진속의 주인공이 당장이라도 사진 밖으로 튀어나올것만 같다.     © 김명수기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국민영화 실미도의 소재가 되었던 실미도 684부대. 68년 1월21일 김신조 무장공비 일당의 청와대 습격기도에 분노한 박정희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김일성 주석궁 폭파를 목적으로 68년 4월 창설한 특수부대다.

만들어만 놓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외딴 섬에서 죽도록 북파훈련만 받던 24명의 훈련병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청와대로 향하다 자폭한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31명으로 출발한 684부대 훈련병들은 모두 죽고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임성빈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역사속의 인물이 되었다. 조국을 위해 충성을 맹세한 실미도 684부대 31명의 훈련병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4명 중의 한 명이다.

임성빈 등 4명은 사형장에서 죽는 순간까지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외치는 애국심을 발휘했다.

임성빈 훈련병은 23살 새파랗게 젊은 청춘에 정부의 감언이설에 속아 북파공작원으로 끌려갔다가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하고 구천을 떠도는 인물이 되었다.

결국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책임은 전적으로 국가에 있다. 만들어만 놓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 없이 죽도록 훈련만 시킨 국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억울하게 죽은 실미도 684부대원들의 원혼을 조금이라도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서 39년 전(前) 버스자폭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임성빈 훈련병의 입장으로 들어가 죽은 자와의 대화를 시도해본다.

1971년 8월23일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혹독한 훈련과정에서 31명중 동료 7명이 죽어나가는 참상을 생생히 지켜본 실미도 훈련병 24명이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 버스 안에서 수류탄으로 집단 자폭을 기도하여 18명이 현장에서 장렬히 생을 마감한 날이다.

자폭 현장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6명의 훈련병중 병원으로 후송되는 과정에서 팔다리가 잘린 2명이 죽고 끝까지 살아남은 공작원은 단 4명. 이들마저 제대로 변론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채 사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산화한다. 26살 임성빈도 그 중 한명이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4명의 훈련병들은 죽는 그날까지 거의 7개월 동안 취침시간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드러눕거나 벽에 기대어 앉는 법이 없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허리를 꼿꼿하게 편 자세로 정좌를 하고 앉아서 주로 독서를 하였다.

임성빈 등 공작원 4명의 신참 죄수들이 공군본부 사령실 헌병대대가 관장하는 군사교도소에 입감하였을 때 그들 4명에게는 감방장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독방이 주어졌다.

감방장은 같은 방에 있어야 군기를 잡을 4명의 신참죄수를 따로 수용하니 군기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감방장들이 항의를 하였다. 형무계장이 그들에게 대답했다.

“너희를 저들하고 한 방에 넣으면 저들이 너희들을 이빨만 남겨놓고 하룻 밤 사이에 깨끗하게 먹어버릴 것이라고….”

그 얘기를 들은 시간 이후부터 그 교도소에 수감된 모든 죄수들은 그들의 독실을 지날 때마다 부동자세로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그들이 묵상을 하는 동안에는 숨소리도 내지 않아서 교도소가 절간 같은 침묵만이 흘렀다.

최후의 날이 왔다. 임성빈을 포함한 4명의 사형수들을 태운 차량이 서울 외곽의 군부대 사격장에 멈춰 섰다. 황량한 벌판에 4개의 말뚝이 쓸쓸하게 그들을 맞았다. 검찰관이 사형집행 선언을 하자 포승줄로 칭칭 감긴 공작원들에게 눈 띠가 가려졌다.

마지막으로 할 말을 묻자 “만세 삼창과 애국가를 부르고 싶다.” 고 했다. 임성빈이었다. 4명의 훈련병들이 부르는 만세삼창과 애국가가 사형 집행장에 처량하게 울려 퍼졌다.

이어서 총기와 실탄을 배급받은 사수들이 헌병 중대장의 지휘로 사대에 들어섰다. 중대장이 지휘봉을 쳐들었다. 사수들이 시선을 집중한다.

“ 사수 사대를 향하여 5보 앞으로 갓 !”

“ 목표, 정면의 타깃 서서 쏴 ! “

“ 실탄 1발 장전 !"

가스 활대가 후퇴했다가 실탄을 약실로 밀어 넣는 소리가 사형수들의 귀에 들어왔다.

“ 거총 ! “

“ 발사 !”

“탕! 탕! 탕! 탕!”

거의 동시에 12개의 카빈 소총 총구에서 발사되는 총소리가 들렸다.

“ 거총 바로!”

“ 약실 검사!

“ 총기에 이상 있나?”

“ 이상 없습니다.”

사수들이 퇴장하고 군의관들과 의무병들이 시신 앞으로 향했다. 그런 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형수중 한 명이 머리를 고통스럽게 흔드는 것이 아닌가? 손목도 움직였다. 4발 중에 두발을 맞고도 절명하지 않았다. 임성빈이었다.

퇴장했던 사수들에게 대기 명령이 내려졌다. 군의관이 임성빈의 연명상태를 확인하더니 5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4분이 지난 후에 더 이상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형수 모두 절명하였다는 군의관의 보고에 따라서 검찰관의 사형집행 종결이 선언되었다. 군의관, 의무병, 헌병들만 남고 모두 차에 올라타서 그 현장을 빠져나갔다.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맑은 하늘에 4 마리의 까마귀가 나타났다. 사수로 참여했던 헌병 한명이 처절하게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울부짖었다.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리고 저희들을 용서하소서! 김일성이가 맞아야 할 죽음을 무고한 저들이 대신했습니다. " 단말마처럼 울부짖는 병사의 넋두리가 저 멀리로 퍼져 나갔다.

충남 탄천중학교를 졸업한 임성빈은 1968년 4월 실미도 684부대 공작원으로 끌려갔다.

당시 23살이었던 그는 유성에서 미장원을 하는 여성과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입구에서 동네 깡패들하고 시비가 붙어 혼자 건달 3~4 명을 눈 깜짝할 새 때려눕혔다. 이를 공작원 물색조가 보고 임성빈을 실미도 684훈련병으로 포섭하였다.

6개월만 훈련받고 국가임무를 완수하면 애국한 대가로 평생 먹고 살 거금을 준다는 약속을 다짐받고 북파공작원에 끌려갔다. 그리고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가 실미도 684부대원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무덤까지 비밀로 하기로 국가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연락이 끊긴 그의 소식을 몰랐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동생 임홍빈은 억울하게 죽은 형의 명예 회복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니다 재작년에 사망하였다. 동생은 얼굴도 못 본 형 임성빈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생업을 포기하고 매달리다가 건강을 잃고 결국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임홍빈은 생전에 꿈을 꾸면 형이 나타났다. 꿈에서 형인 임성빈이 실미도로 끌려가기 전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딸이 보고 싶다며 꼭 찾아서 잘 보살펴 달라고 했다. 동생 임홍빈은 형수와 두 조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들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실미도에 끌려가 억울하게 숨진 31명의 실미도 훈련병들. 그 중에는 한동네에 살던 옥천 출신 훈련병 7명도 포함되어 있다. 육영수 여사의 고향에서 태어나 조국 위해 내 한 몸 애국하면 국가와 가문에 영광이자 평생 돈 걱정 없이 먹고 살수 있다는 약속을 받고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국가의 거짓 약속에 속아 불타는 충성심 하나로 모진 훈련을 다 견디어 내고 결국은 새파랗게 젊은 청춘에 억울하게 죽어갔다.

가족들이 보고파도 만날 수 없었다. 꿈속에서나마 부모형제 만나기를 기도하며 잠 못 이루고 울었다. 영웅이 돼서 금의환향할 그날을 위해 참고 또 참았다.

왜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청와대로 향했을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완수 없이는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없었던 현실 앞에 죽기를 각오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호소하기 위해 청와대로 향했습니다.

정부는 당초에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우리를 배신했습니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 진상규명은 대통령만이 할 수 있다는 판단아래 청와대로 향했습니다.

3년여 지옥훈련을 극복한 우리가 이득만 찾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면 왜 청와대로 향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 그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하고픈 말이 너무 많습니다. 1.21사태에서 박정희 목따러온 김신조는 잘 먹고 잘사는데 국가에 충성을 맹세한 31명의 훈련병들에게 국가는 왜 그토록 가혹한 폭력을 행사했습니까?

애초에 북파시키지 못할 684 유령부대를 왜 만들어 훈련병들의 운명을 20~30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도록 방치했는지요?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에 절규하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편지를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전해달라며 승객에게 건네주고 죽은 옥천 청년 7명중 박기수 훈련병의 가슴 아픈 사연을 전해들은 유가족의 찢어지는 고통을 생각해 보셨는지요?

우리 훈련병들의 꿈과 야망을 왜 이토록 처참하게 짓밟고 죽음으로 몰아갔습니까? 국가에서 마지막 실미도 부대를 해체하고 훈련병들을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을 우리 훈련병들이 알았을 때 그 심정은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3개월 후에 북파시킬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3년 4개월 동안 단 1번도 북파시키지 못한 국가. 애초에 만들지 말았어야 할 684부대를 만든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훈련병들에게는 3년 4개월이 300년 같은 악몽의 시간이었습니다. 기간병들은 훈련병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서야했고 훈련병들은 살아 고향에 돌아오려고 탈출을 하였지만 간첩, 난동분자로 몰려 국가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못하고 한 많은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국가가 우리를 원했고 우리는 국가를 위해 충성했지만 국가는 훈련병들을 버렸습니다. 유한양행 앞 버스에서 자폭하는 과정에 다 죽고 팔다리가 잘린 채 살아남은 저 임성빈 등 4명의 훈련병들은 또 국가를 믿었건만 국가는 우리를 배신하고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군번 없는 군인이라 하여 우리를 세상 사람들과 단절시키고 노예 아닌 노예가 되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유령 인물로 살다 갔습니다.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못들은 척 해야 했던 독재정권 시절 31명 훈련병들에게 국가는 너무나 비정했습니다.

60년대 보릿고개 시절 쌀밥 한번 못 먹은 형제들 잘 먹이고 싶어서 실미도에 갔습니다. 매달 가족에게 편지와 월급을 보내준다는 약속과 달리 외부와 단절된 삶과 군번도 주지 않아 휴가 한번 못 가고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불쌍한 영혼들은 넋이 되어 울고 있습니다.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를 떠올리며 먼저 죽을 때 눈을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면 옥천 청년 7명은 서로 꼭 부둥켜안은 채 죽었을까요?

선진국인 미국 프랑스 등의 국가에서는 국가를 위해 죽은 유공자들은 영웅대접해주고 그 가족에게도 국빈 대접을 해준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청년들을 간첩이니 난동분자니 사형수 무기수라는 오명을 씌워 죽어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오직 국가를 위한 불타는 충성심으로 목숨 바쳐 애국하면 미래를 보장해준다는 약속을 굳게 믿었던 국가로부터 살아서 버림받은 우리 훈련병들은 죽어서조차 국가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하고 은폐되었습니다.

유가족들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훈련병들의 시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집단 암매장하여 은폐함으로써 국가는 우리를 두 번 죽이는 죄를 저지른 꼴이 되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큰 일 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혈기 왕성한 31명의 공작원들이 68년 4월 실미도에 집결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약없는 3년 4개월…

68년 11월 단 한 번의 북한 침투 명령이 떨어졌다가 전격 취소된 이후 단 한 번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며 훈련병들이 물어도 기간요원들로부터 똑 부러지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훈련중에 7명이나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두 눈으로 목격하면서 실미도에 갇혀 훈련만 받다가 모두 죽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아무도 훈련병들의 장래를 보장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모두 개죽음을 당할바엔 차라리 우리의 불같은 애국심과 끓는 분노를 청와대에 알리기라도 하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71년 8월23일 억울함을 호소하러 나온 훈련병들을 난동분자 간첩으로 몰아세우고 버스 안에 민간인이 있는데도 군인들이 왜 먼저 총격을 벌였습니까?

훈련병들은 군인들이 쏘는 총에 버스 안에 있는 민간인이 맞을까봐 머리를 숙이라고 했는데 정부는 협상도 안하고 선제공격을 하여 민간인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한양행 앞에서 우리 훈련병들이 몰던 버스가 가로수와 충돌하고 멈췄을 때 우리가 왜 집단 자폭을 했는지 아십니까?

더 이상 총격전을 계속 벌이다가는 군경들의 무차별 사격에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이 염려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살고 싶었습니다.

아무 죄 없는 우리 훈련병들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부모한테 말없이 국가에 충성하여 잘했다는 칭찬 듣고 싶었지요. 그리운 부모형제 사랑하는 친구들이 보고 싶었습니다.

국가에 속았음을 알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훈련병들의 불안한 삶은 살아서도 지옥이었습니다. 누구하나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 무인도에서 해방과 자유가 미치도록 그리웠습니다.

하지만 31명의 우리 훈련병들은 마지막으로 몸부림치며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했던 증거를 남겨놓고 처연하게 죽음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피플코리아가 최초로 시도한 죽은 자와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국가를 믿고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했지만 마지막까지 국가에 속아 변론 한번 제대로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죽어가면서까지 애국심을 발휘한 임성빈의 절규가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누가 이들의 슬픈 영혼을 달래줄 것인가? 누가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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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코리아/ 김명수기자 www.peoplekorea.co.kr>

2010년 11월03일 13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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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11/02/07 [22:38] 수정 삭제  
  이야기를 읽고있자니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에 울부짖었을 실미도 부대원들의 얼굴이 보이고 절규가 들리는 듯 합니다. 많이 늦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좀더 관심을 갖고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할 듯 합니다. 가슴이 많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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