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시리즈] 나도 할말있다 제25탄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3-

용불용설. 적자생존. 먹이사슬. 군대서도 통하는 말이다. 한번 찍히면 영원한 희생양이 된다. 시범케이스로 걸리면 제대하는 그날까지 고문관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이를테면 영원한 왕따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고문관으로 낙인 찍힌 사병은 얻어터지는 것이 체질처럼 굳어진다. 터지면 터질수록 터져야 마음이 놓이고 때리면 때릴수록 더 때리고 싶은 묘한 이중심리.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율배반적인 사고방식이 상존하는 것이다.

전방을 코앞에둔 우리부대. 항상 긴장속에 살아가지만 막상 그곳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면 이곳이 전방인지 후방인지 실감이 안날정도로 둔감해 진다. 처음에는 온몸이 석고처럼 굳어버릴정도로 바짝 긴장을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차츰 몸도 마음도 나태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도 두 번 세 번 들으면 나중에는 식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문관. 인간으로써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는 말이다. 내가 군대생활에 제법 익숙해져 가는 시기에 졸병이 들어왔다. 모든 졸병들이 처음에 그랬듯이 그 이등병 또한 너무 긴장을 하여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고참들과 처음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표정은 나무토막같이 굳어 있었다.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백치와 같았다. 누구나 바보가 되는 것이다. 고참은 이것저것 장난을 치듯이 물어온다. 그러면 졸병은 목구멍이 터져라 큰소리로 대답을 한다.

고참이 묻는다. "너네집 주소가 어디?" 졸병이 대답한다."서울입니다" 고참이 배를 군화발로 걷어차며 큰소리로 겁을 준다. "서울이 다 너네 집인가" 바짝 주눅이 든 졸병이 대답한다.

"아닙니다" 다른 고참이 다시 묻는다. "애인있나?" 졸병이 대답한다. "예, 있습니다" 고참이 다시 묻는다. "애인 나한테 줄수 있나?" 졸병이 머뭇머뭇한다. 그러자 고참이 다시 한번 군화발로 졸병의 급소를 걷어찬다. 졸병은 흑소리를 하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고참은 졸병이 숨을 고르기도 전에 다시 한번 큰 소리로 기를 죽인다. "군대서 고참은 하늘보다 높다. 알았나?" 졸병이 대답한다. "예, 알았습니다" 고참이 다시 묻는다."느그 애인 나한테 줄수 있나? 없나?" 그제사 분위기를 파악한듯 졸병이 목에 힘줄이 튀어나올듯 힘주어 대답한다. "줄수 있습니다" 내무반은 한바탕 배꼽잡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졸병은 너무 긴장을 한탓에 천지분간 못하는 간난아이처럼 어쩔줄을 모르고 몸을 부르르 떨기만 한다.

군대라는 울타리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준다. 머리가 좋은 사람도 머리가 나쁜 사람도 군대서 바보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이 졸병 사회에서는 잘나갔다. 모 재벌의 장남이었다. 그러나 군대와서는 억수로 운이 나빴다. 일단 나이가 많았다. 왕고참보다도 많은 나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대학원 졸업한 박사출신이었다.

사회에선 잘나가는 지식층이었는데 군대와서 보니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는 말단졸병으로 전락한 자신이 한심해보였던지 가끔씩 어이없다는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개인으로 봐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한 셈이니 어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겠는가?

묘하게도 군대에서는 학력이 낮은 졸병들이 훨씬 더 적응을 잘했다. 똑같은 기합을 받아도 펄펄 날았다. 그런데 이 학력높은 재벌2세 신참은 자대에 오자마자 고참들로부터 고문관으로 낙인 찍혔다.

기합을 받으면 기합에서도 처지고 교육을 받으면 교육에서도 처졌다. 왜 그럴까. 정서적으로 군대체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속된말로 고생이라고는 모르던 책상머리가 늦깍이 나이에 군대에 끌려와서 온갖수모를 다 겪고 있는 것이다.

이 졸병 결정적으로 찍혔던 내막이 코미디보다도 더 희극적이다. 사연은 이렇다. 그의 아버지가 부대로 면회를 왔다. 처음에 우리는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비상종이 울렸다. 전부대원이 집합하라는 신호였다. 우리는 하던 동작을 멈추고 모두 연병장에 집합을 했다.

알고보니 그 졸병의 아버지가 면회를 온 것이다.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전부대원이 먹을 음식을 운전기사가 딸린 자가용에 가득싣고 서울에서 머나먼 이곳까지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거기에 한술더떠 거액?의 금일봉까지 전달했으니 부대장이 그의 재력과 위력에 깜빡하고 기가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군기빠진 졸병을 보는 사병들의 마음은 달랐다. 고참들은 속으로 제깟 졸병녀석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그렇게 군대에서까지 티를 낼 이유가 뭐냐면서 한마디씩 했다.
 
고참들은 돈없고 빽없는 놈 어디 서러워서 살겠냐고 트집을 잡으면서 툭하면 그 졸병을 불러다 놓고 괴롭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날 면회사건 이후로 그 졸병은 고참들로부터 더욱 왕따를 당했던 것이다. 결국 그 쫄병은 우리부대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좀더 보직이 좋은 상급부대로 전출을 가고 말았다.

군대가 바로 그런 곳이다. 적어도 내가 생활하던 쌍칠년도 시절엔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변했을 것이다. 이글은 특정인과 관련이 없습니다.

다음에 이야기 계속됩니다.
 
김명수
 
2000/02/14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