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시리즈] 나도 할말있다 제11탄

-카투사를 아십니까?(4)-

<미군과의 에피소드 2> 좋은 미군 나쁜 미군①

내가 맡은 임무는 중대의 Supply(공급계). 중대에 필요한 물품을 관리하고 분배하는 것이 주업무다. 부대원들이 쓸 화장지에서부터 작전수행에 필요한 물품까지 모두 다 챙겨야 하는 일이 처음에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모든 군인들이 자신의 업무를 어렵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Supply Room에는 Yamamoto라는 미군이 모든 charge(책임)을 도맡고 있었다. 그 밑에는 우리 왕눈이 고참(현재 이 분은 방송국 기자로 일하고 있다)이 있었고, 그 밑에 Miller라는 미군과 내가 있었다. 미군들과의 생활은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많이 바꿔 놓았다.

아직 왕 신병인 나는 우리 중대의 뉴스의 핵이었다. 나의 행동 하나 하나가 카투사 고참들의 레이더 안에 잡혀있었다. 심지어 미군과 대화중에 조금이라도 크게 웃으면 그날은 어김없이 push-up으로 혹독한 웃음의 댓가를 치러야 했다. 군기빠진 미군들과 실없는 얘기를 하다보면 신병의 기강을 무너뜨릴 소지가 많다는 것이 고참들의 이유였다.

우리 사무실의 Yamamoto는 일본계 미군이었다. 그의 부친은 2차 대전 당시 미국 하와이로 강제 노역을 떠났다. 어찌 보면 전쟁의 피해자인 셈이다. Yamamoto를 처음 본순간 일본식 이름과 특유의 외모 때문에 나도 모르게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함께 생활하다 보니 그에 대한 생각이 잘못된 편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의 카투사 생활에 진실된 친구이자 선배로서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생김새만 일본인이었지, 마음은 천사 같은 하와이언이었던 것이다.

나의 군생활 초기는 그야말로 주눅의 역사였다.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우리 카투사도 나름의 군기가 강했기 때문에 고참이 있을 때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다.
 
Yamamoto와 Miller는 그런 나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많이 도와주려 애썼다. 우리 왕눈이 고참은 성격이 워낙 급해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무슨 꼬투리라도 생기면 그 자리에서 폭발해 버리는 다혈질이었다. 그날도 내가 Yamamoto의 얘기를 잘 알아듣지 못해 일이 터지고 말았다.

Yamamoto : "Yo Kim! ain't U clean-up d water-fountain"
(상기야! 가서 식수대 좀 치우지 않을래?)

난 듣지도 보지도 구경도 못한 water-fountain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버튼을 누르면 물이 위로 솟구치는 정수기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왕눈이 고참에게 또 한소리 듣기 싫어서 문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water-fountain이 뭔지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해메고 있었다. 결국 왕눈이 고참이 눈치를 챘는지 나의 귀를 한 번 잡아당긴 것으로 위기일발 상황은 조용히 마무리 됐다. 하지만 그 순간 나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지고 말았다. Yamamoto는 그런 나를 보고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Hey Kim! U're pretty, Mr. O? Hiz pretty Ugly. U'd man!"
(상기야 넌 잘생겼고 오씨는 무척 못생겼다. 넌 잘할 수 있어)

나의 마음을 풀어줄려고 그가 우스개 소릴 한 것이다. 항상 그는 이런 식이었다. 우리 카투사 고참들은 신병인 나에게 군기를 잡기 위해 다그쳤지만, 그는 친구처럼 나를 위로하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한없이 고마운 분이다.

우리 카투사들은 Board(영어로 군생활에 관련한 모든 규칙들을 묻고 답하는 일종의 군생활 측정 테스트)에 참석하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말이 규칙이지 두꺼운 영어 책을 깡그리 다 외우는 식이다. 태극기의 뜻에서부터 미군의 군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걷는 방법에서부터 총쏘는 법, 경례하는 법 등)을 망라하는 종합 사전을 다 외우고 시험을 봐야한다. 이 Board는 중대-연대-대대의 순서로 계속 퀴즈 형식으로 이뤄지고 미8군 Board에서 우승한 카투사는 미국연수의 특전도 받게되는 영광도 누리게 된다.

이병 말엽부터 시작된 나의 Board생활은 그야말로 지옥의 시간들이었다. 3시간 정도를 외우고 1시간 테스트 받고 영어 발음이나 철자 하나만 빠져도 고참들은 어김없이 나에게 push-up이란 쓴 약을 먹이곤 했다. 중대급에서의 우승은 우리 중대의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인들에겐 ‘지면 안된다’라는 막무가내 고집이 있지 않은가? 하긴 그 고집은 카투사뿐만 아니라 우리 중대 전체 미군들에게도 작은 영광이었으니 부릴 만도 했다.

하여간 Board로 치인 약 6개월간의 괴로움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Board에서 지고 나서는 엄청 굴렀다. 변명을 덧붙이자면 패인은 타 중대 경쟁 카투사가 굉장한 실력인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세 번째 Board.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이젠 나의 자존심도 허락치 않을 것 같았다.

결과는......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내가 우승을 한 것이다. 그 동안의 설움과 멸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가장 좋아해 준 사람이 바로 Yamamoto였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는 막사의 복도를 소리를 치며 뛰어다녔다. 그리고는 날 꼭 안아주었다. 그 때 그는 나의 큰형이었다.

그런 그가 내가 상병을 달았을 때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는 미국으로 가기 전에 나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전통 하와이 옷과 자신의 가족사진까지 나에게 선물했다. 하지만 가장 큰 선물은 그와의 좋은 추억이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처음 보았을 때 일본인 이름과 생김새로 선입견을 가졌었지만, 그는 진정한 나의 절친한 친구이자 인생의 선배였으며, 힘들 때마다 날 위로해 준 큰형 같은 존재였다. 그에게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이유 없이 업신여기지 말 것. 진정한 우정은 나이를 떠나서 생길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항상 유머러스한 인생 철학 등등. 나의 진정한 친구 Yamamoto!

만약 내게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할 기회가 온다면 난 반드시 Yamamoto를 찾아볼 것이다. 그가 나를 따뜻하게 대한 것처럼 이제 나도 그를 따뜻하게 반길 준비가 돼 있으니 말이다.

<다음 예고>미군들과의 에피소드2 (좋은 미군 나쁜 미군②)
 
김상기

2000/01/20 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