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시리즈］나도 할말있다 제9탄

-카투사를 아십니까?(2)-

<의정부 자대로......그리고 죽음의 신고식>

평택 카투사 훈련소에서의 마지막 관문은 영어시험. 군대생활의 운명이 거기에 걸려있다. 시험 성적에 따라 카투사생활도 천차만별이 된다. 카투사라고 다같은 카투사가 아닌것이다. 영어시험을 잘 본 동기들은 좀 더 편한 부대로 배치를 받게 되고, 잘못 본 친구들은 악명 높은 보병 2사단으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운명이 갈린다는 그 시험에서 나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어디로 배치될지 겁이 덜컥 났지만 그래도 보병 2사단으로 가진 않았다. 나의 부대는 항공여단. 미군부대 중에서 카투사들이 가장 가고 싶다는 용산에 그 본부가 있었다. 은근히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보다 시험을 잘 보고도 동두천이나 평택같이 서울과 거리가 먼 곳으로 가는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에 난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이 발령이 난 동기들과 함께 용산에 도착하자마자, 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내 동기들은 용산에 남고, 나만 의정부로 발령이 난 것이다. 그 때 용산에서 의정부로 날 끌고 갈(?) 선임병장이 내뱉는 딱 한 마디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넌 운도 더럽게 없다.”

오∼ 하늘이시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의정부! 내가 앞으로 2년 동안 지낼 미군캠프에 도착하자 겁이 덜컥 났다. 그런 내 모습이 불쌍해 보였던지 선임병장은 나를 캠프 밖으로 데리고 가서 비빔밥을 사줬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한국음식인가. 꿀맛이었다. 선임병장은 나에게 이런 저런 좋은 얘기들도 많이 해주었다.

“그 동안 힘들었지? 앞으로 잘해보자.”

고참의 따뜻한 음성이 얼어붙은 내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줬다. 그 순간만큼은 그 고참이 피를 나눈 친형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카투사는 편하구나... 선임병장이 저렇게 따뜻하다니...’

하지만 그날 밤 나의 예상은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죽음의 신고식.

7시쯤 막사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자기 전까지 내가 겪은 그날의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황당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선임병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나도 마음이 마치 대학 선배를 대하듯 편했는데,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push-up(팔굽혀펴기)을 수도 없이 해야했다.

이걸 내가 왜 하는 건지. 몸이 힘든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부산함 속의 긴장감은 지금 생각해도 온 몸이 짜릿짜릿하다.

선임병장이하 부대고참들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연신 구르고 외우고... 또 구르고 외우고...

신고식을 준비하다가 난 드디어 큰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이 실수로 나의 군생활은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신고식의 방식은 각 부대마다 다른데, 우리 부대의 신고식 하이라이트는 거수경례와 신고 멘트. 거수경례는 순식간에 손을 올렸다가 내리는 방식이고, 신고 멘트는 상식적으로 절대 이해될 수 없는 음정의 높낮이로 누가 들으면 분명 마구마구 웃을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왕신병인 내가 그 긴장감이 팽팽한 분위기에서 거수경례를 연습하다가 크게 웃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고참의 얼굴에 침이 튀도록, 아주 화통하게...

그 방에 있었던 고참들의 눈빛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들은 모두 놀란 황소눈이 되었고, 몇몇 눈치 없는 고참은 킥킥거리며 같이 웃었다.

그리고 몇 초간의 침묵!

난 위험이 직면했음을 동물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고참의 한마디.

“박아! 빨리 박아!”

그런 와중에 우리 미군 부대원들과 중대장도 날 보러 왔다. 처음으로 잡아보는 그들의 손! 땀에 흠뻑 젖어 꾀죄죄한 나를 그들은 편하게 맞아주었다. 미군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또 일이 꼬였다. 내가 미군들과 악수를 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미소와 말을 보냈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정이 넘어서야 신고식이 끝났고, 모두 모여 앉아 라면을 끓여먹었다. 라면은 어디로 들어갔는지도 모르고 내가 어떤 장기자랑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나의 몸은 녹초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신고식 때의 나의 엉뚱한 여유는 두고두고 내 신병생활을 괴롭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음 예고> 미군들과의 에피소드 1(엉? 그게 그 뜻이야?)
 
김상기
 
2000/01/17 1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