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시리즈] 나도 할말있다 제8탄

-96년 수해때 목숨을 잃은 전우도 있습니다-

다음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vrman01)분이 보내온 내용을 재정리한것입니다.

아직도 비오고 천둥치는 날이면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1996년 8월의 마지막 날로 기억된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것처럼 며칠째 폭우가 계속됐다.
 
휴가를 앞두고 내리는 장마비로 몸은 피곤했지만 며칠만 있으면 집에 갈수 있다는 기대로 마음은 즐거웠다. 새벽 4시 근무를 마치고 잠시 잠이 들었다.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모두 일어나라는 것이다. 아직 기상까지는 1시간이나 남았는데…

영문도 모르고 일어났다. 알고보니 산사태로 위병소길이 두절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부대 전우들은 새벽비를 맞으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아직 집중호우가 내리고 있는 상태에서 작업을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위병소 앞길이 산사태로 엉망이 되었다. 도로는 간데없고 무너져내린 나무들로 뒤엉켜 있었다. 나와 고참2명이 톱을 들고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나머지 전우들은 흙과 돌을 치우고 있었다.

장대비를 맞으면서 정신없이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돌발사고를 당한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몸이 산사태와 함께 좁은 계곡쪽으로 쓸려 내려가고 있었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했다.

나무, 흙, 돌, 빗물등과 함께 내몸이 쓸려 내려갔다. 쓸려내려가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급한 상황속에서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위병소 앞에있는 커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가 워낙 커서 아직 쓸려내려가지 않은 상태였다.

죽을 힘을 다해서 나무에 매달렸다. 놓치면 끝장이었다. 더이상 산사태는 없었다. 최악의 위기는 넘긴것이다. 폭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한번 폭격당한 자리가 안전한 것처럼 산사태도 마찬가지였다. 산사태가 한번 쓸고내려가면 다음에는 덜 위험했던 것이다. 하늘이 도왔는지 세상에 할일이 남았는지 죽음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제서야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신을 차려 나무기둥을 잡고 주위를 둘려보았다. 길은 끊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로의 가장자리를 제외한 부분은 2m정도의 도랑이 생겼다. 폭우가 휩쓸고간 처참한 현장이었다. 그 가운데 내가 있던 나무둥치 부분이 남아있었다.

나와 같이 작업을 하던 전우들이 걱정되었다. 같이 작업하던 고참중 한명이 바로 윗나무에 있는걸 발견했다. 나머지 고참1명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나를 부르는 간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위험하니 빨리 건너오라는 것이다. 건너갈수 없었다. 길중간에 파인 도랑으로 급류처럼 흐르는 물살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물길속에 뛰어들었다간 살아남지 못할것 같았다.

고참과 망설이고 있는데 뒷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참이 살려달라고 하는 절규였다. 그 고참은 나무에 깔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달려가 나무에 깔린 고참을 빼내려고 했지만 다리 부분이 꺾여있어 실패했다. 할수없이 고참을 덮은 흙과 나무가지 부터 차근차근 치우기 시작했다.

흙더미를 반쯤 치울때 빨리 탈출하라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순간적으로 위를 보았다. 산사태가 도로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것같았다. 구하던 고참도 손을 쓸수가 없었다. 급류의 물살을 건넜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해보이던 물살이었는데 살아야겠다는 마음에 본능적으로 뛰어들어 건널만큼 괴력이 발동한 것이다. 겨우겨우 길 가장자리로 나왔다.

흙, 돌, 나무, 물등이 마구 섞여 검게 보이는 물체가 지나가고 나서야 살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같이 도랑을 건너던 고참은 넘지 못하고 그 검은 물체에 쓸려내려 갔다. 길 가장자리에 있던 전우들은 고참이 휩쓸려 내려가는 끔찍한 장면을 생생히 보았다고 한다.고참이 그곳을 건너는 도중 돌에 머리를 맞고 쓰려져 쓸려내려가던 처참한 모습을…

우리가 막사로 복귀하려고 할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무에 깔렸던 고참이 혼자 힘으로 걸어나온것이다. 고참을 덮친 나무를 산사태가 같이 쓸고 내려가 살아난 것이다. 흙더미와 함께 쓸려내려가던 고참도 위병소 옆계곡 입구에 나무가 걸리는 바람에 천우신조로 살아난 것이다. 우리 부대원은 모두 그 고참을 구하려 달려갔다.

고참을 구하고 막사로 무사히 복귀하는 데 그때서야 내몸에 이상이 있는것을 알았다. 너무 긴장해서 그때까지 아픈줄도 몰랐던 것이다 . 그때 입은 흉터때문에 나는 아직도 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행운이다.

그당시 내가 복무하던 이웃부대에서는 많은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때의 폭우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창설이래 처음으로 우리부대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군장을 싸고 부대를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군에서 자기 부대를 포기한다면 얼마나 다급한 상황인지 미루어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96년 수해때 목숨을 잃은 전우를 향해 기도를 해야겠다.

다음에 이야기 계속됩니다.
 
김명수

2000/01/16 1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