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이사람］(29) 지방연극 지킴이 전춘근

［클릭이사람］(29) 지방연극 지킴이 전춘근

전주시립극단 수석단원 전춘근(36). 전북 연극계에서는 가장 잘나가는 여배우로 통한다. 판소리 민요 춤에서 국악기까지 우리것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그녀는 지금 24일 개막하는 '광대들의 학교' 반장역 맡아 구슬땀을 쏟으며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지방연극문화의 활성화에 기여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모든 악조건을 이겨나가고 있다.

그녀의 학교생활은 평범했다. 큰소리로 웃어본적이 없을정도로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아이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어쩌다 만난 동창들도 "어머 네가 연극을 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하고 깜짝 놀라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성격이 변해서 연극 배우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표를 정하면 한눈팔지 않고 끝없이 노력하는 집중력과 성실하고 순진한 성향이 그를 연극에 빠져들게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고 싶거나 좀 튀어보려고 연극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가정형편으로 대학을 자퇴한 뒤에 우연히 시립극단 단원모집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별생각 없이 응시를 했다.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며 노래하고 춤추는 선배들의 모습이 보였다. 연습에 푹 빠져 있는 그들을 보면서 자신은 시간을 허송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당시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전도사나 목회자가 되어 강단에 서는 일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연극 같은 것은 잠시의 휴식으로 여기려 했다. 그런 그를 다시 연극판으로 불러들인 것은 인형극이었다.

80년대 후반에 우후죽순처럼 어린이극단이나 인형극단이 창단되었다. 그다지 재정형편이 좋지않았던 시립극단도 단원들의 자립을 위해 인형극단(허수아비)을 창단하게 되었다. 인형극에 필요한 사람은 성격이 차분하고 어린이와 잘 어울릴 줄 알아야 했다. 바로 전춘근같은 사람.

그렇게 해서 그녀는 연극판에 불려왔다. 인형도 만들고 대본쓰는 작업에도 동참했다. 그러면서 직접 출연을 했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연극에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도 어렵고 힘들기만 하던 연기의 방법 내지 표현법들을 터득해 나갔다.

당시 지방극단의 경우 연극을 전공한 배우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대개는 대학의 극예술연구회같은 동아리에서 선배들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이사람 얘기 다르고 저사람 얘기다른 주먹구구식 연습이었다. 아무튼 연극의 재미는 전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을 다시 시작한지 일년도 안돼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아직 신출내기 딱지도 떼지 못한 까마득한 후배였던 그가 전국연극제에서 연기상을 탄 것이다. 그 때까지 전북에는 연기상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그의 수상 소식은 큰 경사였다. 그동안 연극한다고 집에서 받았던 수모와 압박도 완화되었다.

평생 연극을 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지만 역기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주위에서 거는 기대감이 오히려 그를 위축되게 만들기도 했다. 갑자기 자만심이 드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실력없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가 와버린 것이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결혼이나 직장문제로 극단을 떠나는 일까지 겹쳤다. 상임연출이던 장성식 선생님(현재 백제 예술대 교수)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는 마치 어린 아이가 가장이 된 것처럼 허둥지둥 했다. 이때 얻은 별명이 싸낙배기.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강한 척을 했을까 싶다.

후임으로 오신 정초왕 선생님(전북대 독문과 교수)은 민주적이고 사리판단이 확실한 분이었다. 단원을 교육하고 시야를 넓히는데 관심이 많았다. 이 분의 재임 기간 중에 시립극단은 제자리를 찾게되고 대단한 발전을 하였다.

그 중 하나가 90년에 객원 연출로 고금석 선생님을 초빙하여 만인보라는 작품을 한 것이다. 이 만인보는 시립극단 뿐만 아니라 전북연극의 분수령이라고 평해야 할 만큼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만인보는 고은 선생의 시인데 각각의 인물들의 건강한 삶과 성격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아름답게 재구성하고 각색한 작품이다. 이 각색작업에 참여하면서 그녀는 자신에게도 이런 능력이 있었나 하는 놀라움과 자신감을 얻었다.

좋은 연극이란 단지 기능이나 기술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바탕이 된 배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광주나 남도의 거센사투리 일색에서 전라북도사투리의 부드럽고 푸진 재미를 알게되었다. 전북 사투리는 아름답다. 또한 전북 관객에게는 전북 사투리가 배우와 일치감을 맛볼수 있는 최상의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93년에 '꼭두! 꼭두!'(곽병창 연출)라는 작품을 했는데 전국 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전통 꼭두각시 놀음을 재해석해서 인형극과 연극을 접목한 형식의 작품이었다. 꼭두 부분을 제작하고 꼭두역으로 출연한 그녀는 연극제 시상식에서 기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꼭두 꼭두의 꼭두는 그 어느 누구보다 잘하고 재미있고 훌륭했지만 인형이기 때문에 연기상을 줄 수 없다" 는 것이다. 인형이니까 연기상을 줄수 없다니… 인형이 그럼 저 혼자 움직였단 말인가? 그럴바엔 아예 처음부터 거론이나 말일이지.

4년 연애끝 93년 4월에 같은 극단의 연극배우 홍석찬과 결혼했다. 생계문제가 걸렸지만 둘다 연극을 계속한다는 것에 합의했다. 둘 사이에 원택(7)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다.

90년대에 여성연극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결혼후 그는 여성의 역할에 더욱 관심을 갖고 몇 가지의 작품을 하게 되었다. ' 네 여인의 이야기', '그 여자의 소설', '각시 야유기'들이 그것이다.

네 여인의 이야기는 출연은 물론 연출까지 했다. 그 여자의 소설에서는 귀분네역을 해서 푸짐하고 맛깔스러운 사투리로 전주 관객의 배꼽을 잡게 만들었다. 각시야유기는 성인인형극이었다. 인형극을 어린이용으로만 인식하는 어른 관객을 끌어들이기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성인인형극을 시도했고 여성의 이야기를 시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각 언론사와 여성단체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2000년이 되면서 고금석 선생님이 상임연출로 오셔서 그 첫 작품으로 '광대들의 학교'를 선택했다. 10년 전 만인보 때 처럼 머리가 터지게 생각을 짜내고 또 짜내 정말 근사하고 멋진작품을 만들고 싶다.

'광대들의 학교'는 자유분방하고 창의성이 풍부한 학생과 시험위주의 엄격한 교사간에 벌어지는 한바탕 해프닝을 한국적 뮤지컬로 꾸민 작품이다. '심청전 패러디'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배우를 양성하는 광대학교 연습현장이 배경이다.

교사와 학생간에 야기되는 흥미진진한 갈등을 기둥줄거리로 체벌위주의 교육과 입시위주의 교육등 교육계가 안고 있는 병폐를 고발하고 있다. 광대들의 학교는 24∼25일 이틀간 전주 덕진예술회관에서 첫공연을 가진후 공단 순회공연 및 서울 초청공연을 할 예정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참 행운아란 생각이 든다. 아직은 인생을 회고할 만큼 오래 살지도 않았고 제대로 살았는지 못살았는지 알수도 없지만 일찍부터 주위의 인정을 받았다. 앞으로의 연극생활을 지켜보겠노라며 모르는 관객이 그녀를 찾아와 꽃다발을 내밀며 격려를 해준다는 것도 기분이 좋다. 또한 그녀를 알아주는 연출가를 만나서 작품활동을 한다는 것은 배우로서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녀는 올 가을쯤 자신이 반장으로 나오는 연극 광대학교를 몰고 서울나들이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 이 기사는 인물뉴스닷컴의 허락 없이 그 어떠한 경우에도 무단 전재나 무단 사용을 금지합니다. 인물뉴스닷컴에 실리는 모든 기사의 저작권은 오직 인물뉴스닷컴에 있습니다.

<인물뉴스닷컴/ 김명수기자people365@korea.com>

2000/05/16 10:10

인물뉴스닷컴 홈으로 바로가기    ☞ 클릭이사람 명단 1~345번 ☜ 
 

☞ 인물 인터뷰 전문기자 김명수의 클릭이사람 취재는 앞으로도 계속 됩니다. 좋은 분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 e메일 people365@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