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이사람] (99) 경마 아나운서 김경준

[클릭이사람] (99) 경마 아나운서 김경준
 
 곤색 정장에 하늘색 와이셔츠가 잘 어울리는 남자. "얼굴도 미남인데 마음씨도 착해요". 여성경마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는 복받은 남자임에 틀림없다. 목소리 좋고 매너 좋고 거기에 얼굴까지 잘생긴 미남이니 더말해 무엇하랴. 처음에는 접근하기 어려워도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새록 새록 정이가는 사람이라고 옆에서 귀띰한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경마장에서 그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사람이길래?

경마 아나운서 김경준(42). 2분에 죽고 사는 2분짜리 인생이다. 그의 중계는 아무리 길어야 2분 안팎이다. 2분동안에 할수 있는 모든 말을 몽땅 퍼부어 댄다. 무리지어 달리는 말들이 서로 앞서 가려고 4코너로 돌아서 막판 스퍼트를 내기 시작하면 그는 0.1초도 아까워 아예 숨을 들이마시지도 않고 말만 한다. 빠르게 빠르게 더 빠르게.

경마장에 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의 목소리를 피해 갈수 없다. 15만 관객이 모두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황금같은 돈이 걸려 있는 레이스를 그가 리얼타임으로 중계하기 때문이다.

목소리만 있고 얼굴은 없다. 그렇다. 팬들에게 그는 얼굴없는 아나운서로 통한다. 얼굴없는 아나운서. 경마장에서 가장 높은 관람대 6층 전망좋은 구석에 꼭꼭 숨어 경마를 중계하는 그사람을 관객 어느 누구도 볼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꼭꼭 숨어서 중계하는 것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보이지 않아도 쩌렁 쩌렁 울려퍼지는 그의 목소리는 경마장 어느 구석에서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정확한 경마중계를 위해서 가장 전망좋은 그자리에 그가 있다는 것을 팬들은 알고 있다.

척하면 삼천리다. 팬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가 김경준이라는 것을 안다. 그의 목소리는 그만의 특별한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시원시원하고 박진감 있어서 좋아요. 경마장에서 베팅한 돈을 날리고 나서 본전 생각에 기운이 빠질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풀립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치거든요. 엔돌핀이 팍팍 살아나는 것 같아요"

팬서비스 차원에서 아무리 재미없는 경주라도 박진감 넘치고 즐겁게 중계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중계를 듣다보면 박진감이 넘치는데 실제 경기를 보면 흥미가 덜하다는 팬들도 있다.

순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뭉쳐서 달리는 그 빠른 말을 따라 중계하려면 얼마나 말을 빨리 해야 할까? 그러나 혼전을 벌이며 달리는 말을 따라가다 보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도 저절로 따라간다. 말이 빨리 달리면 중계도 빨라진다. 기를 쓰고 빨리 달리는 말을 놓치지 않고 중계하기 위해 기를 쓰고 말을 빨리 한다. 그가 중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신들린 사람같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말을 빨리 할수가 있나 싶어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 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팬들에게 돈이 수십억 걸려 있기 때문에 한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2분중계.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고 마지막으로 또 확인하면서 중계한다. 출마표를 확인하고 레이스 현장을 직접 두눈으로 보면서 중계한다. 중계하면서 옆에 놓인 모니터를 보기도 하고 쌍안경으로 말이 뛰는 장면을 관찰하기도 한다. 마지막 코너로 돌면서 말이 혼전레이스를 벌일때 그는 아예 숨을 들이쉬지 않은채 중계를 한다. 그런 그를 보고 어떻게 하면 말을 그렇게 빨리 할수 있는지 비결을 묻는 팬들도 있단다.

아나운서 경력 15년. 원래는 성우가 되고 싶었다. 외화를 보면 배우들의 입맞춤이 대사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도 그런 성우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성우시험에 도전했다 번번히 떨어지고 만다. 85년 8월 마사회 홍보실 소속 아르바이트로 입사하면서 그의 아나운서 인생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실수 투성이였다.

입사후 두달간의 반복되는 연습과 기다림 속에 드디어 중계방송의 기회가 주어진다. 기쁘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는 순간 창밖의 주로와 발주기 그리고 경주거리 표지판과 결승선 등이 뒤죽박죽 어지럽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당장이라도 마이크를 내려놓고 도저히 못하겠다고 말하고 현장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럴수는 없었다. 이순간을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는데…

배짱이다, 배짱. 심호흡을 크게 하고 출주하는 말과 기수소개를 해나갔다. 그러나 출발신호가 떨어지기도 전에 가슴이 먼저 뛰었다. 아니 이럴수가! 그런데 막상 발주기 문이 열리고 말들이 뛰쳐나오는 동시에 그의 입에서도 말들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죽박죽 말을 했다.

어렵게 첫 중계를 마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있는데 주변에서 웃으며 그속도로 중계를 하면 그동안 말들이 주로를 몇바퀴 돌고도 남았을 거란다. 불과 1분이 어떻게 지났는지, 금방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마번 식별이 서툴러서 애를 먹었다. 중계중에 엉뚱한 기수이름을 댄적도 있다. 한 경주가 왜 빨리 안끝나고 그리도 길게 느껴지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무리 길어봤자 2분남짓 밖에 안걸리는 경주가…

엉뚱한 출마표를 가지고 중계를 한 해프닝도 있다. 경마팬이 전화를 해주는 바람에 그제서야 엉터리 중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뒤늦게 사과방송을 하고 부랴 부랴 제대로 된 출마표를 가지고 와서 중계를 했다. 그때 전화를 해준 경마팬이 어찌나 고맙던지…

한번은 출발신호가 울렸는 데도 발주기에서 말 한마리가 꿈쩍을 안했다. 모든 말이 뛰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중계를 했다. 거의 300M 질주를 하고 나서야 한마리가 출발을 안한 사실을 알았다. 그때 팬들의 비난을 가장 많이 받았다. 아나운서는 모든 것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뒤로는 출마표를 일일히 확인하고 출발하면 말이 다 뛰는지 꼭 확인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90년 5월 사내결혼. 88년 서울올림픽때 올림픽 승마경기 본부장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지금의 아내(김혜선·38)를 만났다. 당시 둘다 마사회에서 근무하면서 올림픽 운영요원으로 활동을 했다. 마사회에서 얼굴을 잘 몰랐다가 올림픽 운영요원으로 업무상 교류를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1년을 쫓아다니면서 끈질긴 구애작전을 편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들(대연·11)과 1학년짜리 딸(나연·8)이 있다. 목소리 관리를 많이 한다. 담배는 안피고 방송전날은 절대로 술을 안먹는다. 물을 많이 마시고 잠을 충분히 잔다. 특히 감기가 안걸리게 신경을 많이 쓴다. 심폐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수영을 했다. 배가 안나온 남자. 비결을 물어보니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찌는 특이 체질이란다.

일찌감치 '스파쿨러' CF에도 나왔다. 그뒤로 지금까지 종종 CF에 출연한다. 경마가 없는 평일은 홍보팀에서 홍보업무를 맡고 있다.

경마중계를 15년이나 해왔지만 지금도 어렵다고 실토한다. 생방송 생중계라 마이크만 잡으면 긴장이 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경마 아나운서들과 인터넷을 통한 모임을 만들고 싶다. 기회가 되면 외국에 가서 교포상대로 경마중계도 해보고 싶다.

끝으로 팬들에게 한마디. 경마는 투기가 아니라 2∼3만원으로 가족과 함께 하루를 즐길수 있는 레저의 일부로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사람들의 입에서 경마공원에 놀러 간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수 있도록 건전경마를 즐기는 풍토가 하루 빨리 정착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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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뉴스닷컴/ 김명수기자 people365@korea.com>

2000/11/16 10:0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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