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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275) 서울의 고궁을 지키는 야간 궁지기
 
김명수기자 기사입력  2018/05/21 [15:03]

[세상엿보기] (275) 서울의 고궁을 지키는 야간 궁지기


일주일이 끝나가는 일요일 밤 별과 달이 떠 있는 서울 하늘 아래서 고궁(古宮)을 지키는 야간 궁지기로 근무하는 기분은 어떨까? 그것도 600년 역사의 흥망성쇠 스토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아름다운 고궁 창경궁에서…. 한마디로 기분 짱이다.

 

 
지난 520일 오후 550분경 창경궁(昌慶宮)에 단기 알바 근로자 신분으로 출근했다. 대한노인회 서울시 도봉통합취업지원센터(센터장 한석삼)를 통해 얻은 일자리다. 출근부에 서명을 한 후 근무복장으로 갈아입고 야광봉과 휴대용 소화기, 비상용 구급약을 지참한 50여명의 궁지기들이 춘당지(春塘池) 옆 공터에 집결하였다.
본부장을 비롯한 경비지도사들이 돌아가면서 근무에 필요한 교육을 실시하고 간단한 스트레칭 운동을 한 다음 오후 630분경 각자 부여받은 근무 장소로 이동했다.
하절기 창경궁 야간 개장기간에 야간 관람객들을 안전하게 안내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시설물이 훼손되지 않도록 경비하는 창경궁 궁지기. 비록 단기간 알바지만 근무하는 동안만큼은 엄연한 직장이고 신성한 일터다.

 

 
창경궁내에서도 나의 근무 장소는 27구역으로 경춘전(慶春殿) 앞이다. 오후 650분부터 각자 자신이 맡은 구역에서 정식근무에 들어간다.
오후 710분 경춘전에서 50m 거리에 위치한 통명전(通明殿) 앞 광장에서 창경궁 야간 고궁 음악회 공연이 개막됐다. 오후 7시 야간 개장 시작과 함께 입장한 관람객들로 야외 공연장에 세팅해 놓은 객석이 금세 꽉 찼다.
내 마음은 어느새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왕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기분이 들었다. 예전과 달리 관심을 갖고 보니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새롭고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공연장소인 통명전은 인현왕후의 거처로 쓰였고 내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춘전은 대비의 침전이며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탄생전이다.

 

 
경춘전 현판은 순조임금의 작품이고, 경춘전에 인접한 환경전(歡慶殿)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며 중종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다. 창경궁 궁내 전역에 세월을 뛰어 넘은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잠긴 목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판소리 사철가로 시작하여 시간을 더할수록 본위기가 달아오르고 흥이 넘치는 공연소리가 밤 깊은 창경궁 궁내에 울려 펴진다. 강원블루스 연주 등으로 다양하게 이어지는 레퍼토리에 나도 모르게 귀가 즐겁고 시선이 자꾸 공연장으로 돌아간다.
음악 속에 묻혀 흐르는 시간은 참 빠름을 실감한다. Mother Nature(태초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엔딩으로 장장 50분간 펼쳐진 공연은 아쉬움 속에 막을 내리고 객석에서 일제히 일어난 관중(관람객)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통명전 실내 불빛이 하얀 창호지 밖으로 환하게 새어나오고 경춘전 지붕위로 초승달이 앙징맞게 걸려있어 묘한 운치를 자아낸다.
창경궁 야간 관람객 중에는 가족 단위로 오는 사람과 삼삼오오 곱디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선남선녀가 많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하나같이 표정이 밝고 여유가 있으며 웃음기가 넘친다. 일상에 찌든 삶의 찌꺼기를 잠시나마 훌훌 털어낼 수 있도록 고궁이 주는 매력 탓이리라.
낮에는 한여름처럼 무더운 날씨인데도 창경궁에서 야간 근무를 하다 보면 두툼하게 옷을 겹쳐 입었어도 온 몸에 한기가 돌 정도로 밤바람이 차갑다.
웅장한 경춘전, 환경전 처마와 함인정 그리고 소나무 군락 사이로 올려다보니 어두운 밤하늘에 하얀 점을 콕 찍어 놓은 듯한 별 하나가 희미한 빛을 반사하고 있다.
창경궁 궁지기의 눈에 보이는 야간 풍경이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고 고풍스럽다.
밤이 깊어가면서 부산했던 창경궁의 하루도 저물어간다. 9시가 되자 통명전 실내를 환하게 비추던 불이 꺼지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 어둠이 소리없이 내려앉는다.
 

 
915. 창경궁 궁내에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관람객 여러분 오늘 관람은 즐거우셨습니까? 오늘 야간 관람시간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관람객들은 주변을 정리정돈하시고 정문을 통해서 퇴장해주시기 바랍니다. 역사와 자연이 함께하는 아름다운 고궁 창경궁을 다시 찾아주시기 바라며 안녕히 가십시오.
불빛이 번쩍번쩍하는 야광봉을 오른 손에 든 야간 궁지기 근무자들이 마지막 남은 관람객들을 퇴장하도록 안내한다.
930. 관람객들이 모두 퇴장하면서 창경궁 야간 궁지기들의 210분 근무도 끝이 난다. 940분 궁지기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궁을 빠져나와 각자 집으로 향한다.
비록 몇 개월 짧은 기간일지라도 급여의 많고 적음을 떠나 야간 창경궁 궁지기로 출근할 일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퇴근하는 발걸음이 가볍고 기분이 좋아진다.
김명수/인물인터뷰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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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21 [15:03]  최종편집: ⓒ 인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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