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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선 시니어칼럼] (21, 최종) 시니어, 나의 꿈은 아직도 진행형(ing)이다.
 
신용선 기사입력  2018/02/24 [10:43]

[신용선 시니어칼럼] (21, 최종) 시니어, 나의 꿈은 아직도 진행형(ing)이다.   
  
대체로 젊은 사람들은 시니어들은 지나간 과거 이야기를 자꾸 반복한다고 한다. 내가 젊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60이라는 나이, 어느 새 나도 그 즈음에 성큼 와 있고 나 또한 이제 나이든 사람임을 저절로 느끼는 이유는, 미래보다는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들이 미래보다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남겨 둔 미래시간은 짧고 지나온 과거시간은 상대적으로 길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유년시절 아버지께서 자주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세월을 아주 빠르다 무엇이든지 마음먹으면 전념을 다해 열심히 하라 너도 금방 부모 된다고 말이다. 당시는 사실 이 말씀에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세월은 아버지 말씀에 순응하듯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나를 시니어자리-부모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盛年不重來 (성년부중래) 젊음은 다시 오지 않으며
一日難再晨 (일일난재신)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오지 않는다.
及時當勉勵 (급시당면려)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라
歲月不待人 (세월부대인)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시()1600년 전, 중국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초기에 거쳐 살았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잡시(雜詩)”중 일부이다. ‘及時當勉勵 (급시당면려) 歲月不待人 (세월부대인)’라는 맺음 글 두 문장을 도연명이 진짜 세상 사람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30여전 시니어이셨던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셨던 말씀과도 같은 시구(詩句). 난 도연명의 조언과 아버지의 말씀을 받들어 열심히 살려 노력했다.
 
지금은 버스로 2시간도 채 안 되는 거리지만 과거엔 6~7시간 족히 걸렸던 나의 고향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은 강원도 홍천군과 경계를 위치해 있으며, 나의 유년시절이든 6.70년대는 아주 낙후된 농촌마을이었다. 평지가 적어 논농사도 많지 않았고 경사가 심해 산들이 많아 밭농사도 어려워서 늘 먹을 것이 부족했다. 긴 겨울 동짓달 밤이면 안방구석에 등잔불을 하나 켜놓고 밤늦은 시간까지 방 중앙에 마른 옥수수를 쌓아놓고 부모님과 집안 식구들이 송곳으로 옥수수 알을 따는 일을 겨우내 하였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아버지로부터는 일제 강점기의 일본인과 순경들로부터 당했던 가혹한 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어머니로부터는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할머니가 4살 된 둘째형을 등에 업고 식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하다가 많은 인파(人波)로 인해 피난길에 헤어져다가 한 겨울이 지닌 이듬해 봄 경기도 여주에서 온몸에 화상을 입은 할머니가 새끼 끈으로 숨이 넘어간 어린 둘째형을 등에 매단 채 다시 만나는 천우신조(天佑神助)의 운명적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눈물적시며 들었다. 당시에 어렸던 나는 나라가 다시는 남의 나라에게 빼앗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과 다시는 전쟁이 이 나라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첫 번째 꿈 - 국민학교 4학년쯤 나의 첫 꿈은 술주사(당시 동네사람들이 술주사라고 말했는데 술조사를 그렇게 말했던 것으로 생각한다)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에 집에서 놀던 나와 누나는 술주사만 마을에 나타나면 부모님들이 어린 우리들을 집밖으로 내몰고 대문을 잠근 후 부모님들도 집을 비우셨다. 집 앞 바당에서 동네아이들과 놀다보면 서너 명의 술주사들이 마당구석에 쌓아 둔 소 두엄더미 속을 긴 철근고쟁이로 여기저리를 쑤시기도 하고 앞밭에 쌓인 짚더미를 헤쳐서 무언가 찾기도 하고 그러다가 이웃집으로 옮겨갔다. 거의 서너 달에 한 번씩 이런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에 도착해보니 부모님들이 아주 큰 걱정을 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 이유는 다락방에 보관하시던 누룩을 갑자기 들어 닥친 술주사에게 발각되었던 것이었다. 그 관경을 보았던 나는 술주사들이 정말 무섭고 높은 사람들이구나라고 생각했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술주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것이 나의 첫 꿈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 꿈 - 6학년 어느 가을날 나는 지금은 작고한 사촌형인 은규형과 오목골골짜기에서 나뭇짐을 해 지고 석양이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에 집으로 귀가하는 길이었다. 당시에 은규형은 30살쯤 되었다. 집 도착을 약 20분정도 거리를 남겨둔 산길에서 형과 나는 무거운 등짐에 잠시 쉬어가기 위해 길옆에 지게를 작대기로 바쳐 비스듬히 세우고 앉아서 쉬는 중이었다. 때 마침 다른 사촌 선화형이 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르다 우리와 마주쳤는데 우리에게 지금 내려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금 마을에 산림간수가 와서 집집마다 낙엽송이나 소나무 등 불법벌목을 조사 중이라 마을이 온통 발칵 뒤집혔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낙엽송나무가지를 지게로 한 짐 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사촌형과 나는 그곳에서 어둠이 내리는 밤까지 기다려 집으로 내려왔는데, 기다리던 중에 은규형에 물었다 산림간수가 뭐 하는 사람이냐. 형의 대답은산림간수는 산을 관리 감독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에게 나무하다 걸리면 감옥에 간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에 크면 꼭 산림간수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꿈 - 나는 중. 고등학교가 같이 있는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학교와 같이 있던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고 타지(他地)에 있는 상업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쳤다. 나는 이 학교에 대해 잘 몰랐고 특별히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당시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부면장을 하던 친척 형이 아버지에게 나를 이 학교에 입학시키도록 귀띔을 하는 바람에 상업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게 되었다. 다행히 재주가 좋아 입학시험은 합격했으나 당시 가정에 어려운 일들이 많아 입학을 포기했고 나는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며 사춘기 시절 앞날을 많이 걱정했었다. 그 해 우연히 101일 날 나는 흑백TV를 통해 여의도 국군의 날 행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행사에 참여한 사관생도들의 복장과 열병식에 완전 매료되었다. 다음 날 나는 사관학교 입학을 알아보려고 면사무소 병사담당관을 만나 지원방법을 물으니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으면 입학자격이 안 된다는 말에 다시 학업시작을 결심하게 되었고 사관생도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네 번째 꿈 - 나의 검정고시 시작은 처음에는 고향에서 얼마간 후에는 서울에서 하였는데, 돈이 없어서 최소 도움이 필요한 영어. 수학과목만 잠시 학원 힘을 빌리고 다른 많은 과목들은 독학에 매달렸다. 사춘기 시절을 거의 산속에 사는 스님처럼 절제하며 공부에 매달렸다. 사춘기 시절을 서울에서 지독한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며 검정고시를 마치고 난 후, 나는 서울에서 잠시도 살기 싫어졌고 무조건 서울이란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가깝고 고향에서도 가까운 거리에 국립대학을 찾다가 춘천소재 강원대학교를 입학하였다. 경제적 어려움을 빨리 벗어나고자 경영학과를 선택하였고, 졸업하면 세계를 누비며 일을 하는 무역관련 일을 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빨리 극복하고 싶었다. 학창시절 나는 국제무역을 하여 가정과 국가. 민족에게 도움이 되는 무역인(貿易人)이 되고 싶었다.
 
다섯 번째 꿈 - 대학졸업 후 약 2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나의 네 번째 꿈이 이뤄졌다. 첫 회사 생활을 모() 그룹의 국제운송부에서 수출입 업무를 하게 되었고 후에는 경력이 쌓아지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을 하였다. 직장생활 마지막에는 북한사업을 하던 계열사 사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북한기업 사장들 및 관리자들을 중국 북경에서 자주 만나 일을 하였다. 당시 나는 이산가족과 민족통일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지만 지금도 평양에는 정든 친구들이 많이 살고 있다. 먼 혼날 통일되면 다시 만나 변한 얼굴을 서로 알아볼지 모르겠다. 이 시기 나는 미래 나의 사업에 대한 꿈을 키웠다.
 
여섯 번째 꿈 - 20여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나는 다섯 번째 꿈을 도전하기 위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하면서 나는 또 세 가지 인생목표를 세웠다. 하나는 60세까지는 사업안정을 정착시키고 북한어린이돕기사업을 해야겠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국민과 민족을 위하는 일을 해야겠다. 마지막으로 학업을 더해서 박사학위를 받아야겠다. 그런대 나는 이 여섯 번째 꿈에 도전하면서 세 번에 거친 사업이 능력부족으로 아주 무참하게 깨지고 예상하지 못한 인생경험을 해야 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갑자기 정부가 목재사업정비 관련법 제정. 실시하면서 거의 경영정상화가 되어가던 5년 된 나의 세 번째 사업이 직격탄을 맞았고 정확하게 하루아침에 사업을 올-스톱(all stop)해야 했다. 사업을 정리하면서 정말 아픔이 컸다. 머리끝까지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해 홧김에 나의 꿈 하나를 실현하기로 결정하고 학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박사과정이 금년에 끝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또 스리랑카.몽골 두 나라의 한국투자회사 설립을 진행하고 있다.
 
及時當勉勵 (급시당면려) 歲月不待人 (세월부대인)’을 마음 속 나침판삼아 살아온 인생이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미래시간을 앞두고 있다. 지금의 또래 사람들도 대부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살았던 시니어들 일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이 특별히 예외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어려운 환경을 만나면 극복하려 노력했고 그 극복을 넘어 그 이상의 목표를 다시 세우고 새로운 도전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가족들이 고생이 컸고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꿈은 도전을 요구하며, 성취불성취(成就不成就)간 그 결과는 반드시 현실(現實)이 된다. 이뤄지지 않은 꿈은 실패가 아니라 귀중한 삶의 가치로 적재된다. 시니어 인, 나는 지금 일곱 번째 꿈을 도전 중이며 그 도전은 또 진행 중(ing)이다.(竹林)
 
신용선
경영지도사.시니어칼럼니스트.
베터비즈경영컨설팅 대표
한국오철사회공감연구소 대표
yssfl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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