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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이사람] (512) 민간외교대사로 38년째 헌신해온 ‘한일예술문화교류회’ 문주천 회장
 
김명수기자 기사입력  2012/09/30 [14:08]
[클릭이사람] (512) 민간외교대사로 38년째 헌신해온 ‘한일예술문화교류회’ 문주천 회장

한일고대사 연구와 문화교류를 위해 사비를 털어가면서 일본을 100여차레나 다녀온 사람이 있다.

▲     © 피플코리아
1975년 이래 지금까지 38년째 민간외교사절로 역사 바로 알리기와 국위 선양에 큰 기여를 해온 한일예술문화교류회 문주천(81)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민족 최대 명절인 한가위 연휴 첫날 오후 서울 수락산에 붙어있는 노원구 상계동 수락한신아파트 자택으로 찾아가 그와의 특별한 인터뷰를 했다.

다양한 국제예술문화교류를 통하여 한일 상호 친선발전을 도모하고, 우리의 예술 문화를 해외에 선양한 그의 업적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열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1975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한국다도회(韓國茶道會)를 창립하였으며 1976년 한일문화교류를 시작하여 다도회와 다문화․ 학술․ 예술작품교류전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일본예술문화교류회와 손잡고 오오사카(大阪)에 무궁화무용단을 창단하여 일본에 원조 한류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무궁화무용단의 한국민속무용을 통한 문화교류는 한일 우의증진과 발전에 가교역할을 함으로써 민간외교를 활성화하는 본보기가 되었으며 1995년 3월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공연하여 기립박수를 받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일본 역사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사실을 일본 국민들이 안다면 일본은 결코 한국을 얕보거나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요”

일본국 탄생 신화의 땅이 규슈(九州) 남부에 위치한 미야자끼현(宮崎縣) 기리시마의 에비고엔에 있다. 그 에비고엔에 다까치호노미네(高千穗峰)가 있다.

실제로 현장에 가보면 안개가 자욱하고 신비스러워 일본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기를 소원하는 영산(靈山)이다. 그 꼭대기에는 한국악(韓國岳)이 있다.

일본 건국신화를 품고 있는 기리시마 연산(連山: 산맥)의 최고봉 명칭이 한국악이라니? 왜 일본국 탄생 신화의 땅이 한국악의 발아래 있을까?

놀랍게도 일본의 건국 신화는 고대 한반도 금관가야의 탄생설화와 일치한다. 일본의 건국신화를 품고있는 기리시마 연산의 최고봉 명칭이 한국악이라는 사실은 바로 가야 김수로왕의 건국신화를 모방했음을 말해준다.

일본 건국신화의 현장을 보기 위하여 1989년 일본 규슈의 역사문화 탐방길에 현지 안내를 맡은 일본 고또 씨의 부인이 산 정상을 가리키며 저 봉우리가 한국악이라고 했을 때 받은 충격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     © 피플코리아
“거기서 역사는 발로 써야지 귀로 듣기만 하고 써서는 안 된다는 교훈과 역사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지요.”

일본 민족과 고대사에서 백제를 빼고는 논할 수 없다. 한국악 발아래 펼쳐진 기리시마의 에비고엔 주변에 있는 높은 봉우리를 조견산(鳥見山) 또는 국견산(國見山)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끌려가 일본에 뿌리를 내린 조상들이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자기 고향나라를 바라보는 산이라는 의미가 명칭 속에 담겨 있다.

문 회장이 왜 그토록 한일 고대사 연구와 예술문화 교류에 집착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군산 사범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 경제과를 졸업한 그는 군 면제 혜택을 보장받는 교직을 그만두고 28살 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하였다.

군 복무를 마치고 신문사, 출판사에 다니다가 1975년 한국다도회를 국내 처음으로 결성했다.

“나는 평범한 일보다 개척정신이 있어요. 무엇인가 개척하는 성질이 있어서 한 번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끝을 보고 마는 성격입니다.”

1975년 한국다도회를 만들 당시 일본에서 95명이 문화사절단으로 왔다. 그 사람들과 인연이 되어서 문화교류에 흥미를 가지고 뛰어들었다.

“1975년 9월 일본서 온 사절단에 가끼우찌(垣內) 요세끼라는 인물이 있었어요. 학교 선생이면서 유명한 서예가였어요. 나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선생을 한 경험이 있어서 서로 마음이 통했지요. 둘이 자연스럽게 의기투합이 되어 1976년 한일문화교류회를 만들었어요.”

▲     © 피플코리아
1977년 1월에 제1회 교류전을 미도파 화랑에서 했다. 한국에서 개최한 최초의 해외문화교류였다. 제2회 교류전은 일본 후꾸이현(福井)에서 했다.

후꾸이현 교류전 참가를 시작으로 문회장은 문화, 학술, 다문화 교류를 위해서 일본에 100여 차례나 다녀왔다.

민간외교 사절로 한일 예술문화 교류 개선을 위해 일본을 백번이나 왕래하면서도 정부나 외부 단체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100% 자기 주머니를 털어 해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일본에서 열린 2차 교류회에 간 문회장을 맞이하기 위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남녀 교포 100명을 포함하여, 일본 도지사 국회의원 상공회의소 의장 등 수백명이 열렬히 환영을 해줬다.

“거기서 큰 감동을 받았어요. 문화교류가 이런 것이구나. 그래서 내가 가진 재산을 다 없애도 좋다. 평생 이 일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었죠. 그때 교류전 한 번 개최 비용이 800만원 들었어요. 단돈 10원을 보태준 사람이 없어요. 그 많은 비용 내가 다 부담했어요.”

그때부터 올해까지 38년째 예술문화교류를 해오고 있다. 처음에는 한일문화교류회로 출범하였다가 1978년 문화부에 한일예술문화교류회로 등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몸을 안 사리고 너무 무리를 한 탓인지 4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경희의료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그는 일본 학문의 시조로 추앙받는 왕인 박사의 동상을 일본교류회와 합작으로 만들어 놓았다. 일본에 날짜만 정해지면 올해 안에 오사카에 왕인박사 동상을 세울 계획이다.

일본에도 한국에 우호적이고 지한파가 많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서 알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마쓰모도 아끼시기(松本明重)도 그중 한 명이다. 일본 오끼나와에서 희생된 한국인 386명을 추모하기 위한 충혼비를 마쓰모도 아끼시기가 사비를 들여 교토 탑 옆에 세웠다.

성덕태자가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을 일본사람들은 모른다. 성덕태자는 백제 27대 위덕왕의 친동생 아좌태자로 일본에 건너가 불교와 학문을 전파하고 일본 문화의 최고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100엔짜리 지폐에 성덕태자의 얼굴을 새겨 넣을 정도로 영웅대접 받는 일본조상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한국 사람이다.

백제 위덕왕이 일본으로 건너간 동생 아좌태자에게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준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은 일본 국보제1호다.

이참평공(李參平公)은 공주에서 정유재란때 일본 사까현으로 끌려간 도공으로 일본 도자기(백자)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사까현 다꾸시에서 18년간 도요장을 3군데나 만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아리따로 갔다. 거기서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되었다.

다꾸시에 있는 이참평공 기념관에는 문주천 회장이 기증한 이참평공의 현창비(顯彰碑:찬양비)가 있다.

또한 사까현 아리따에 있는 이참평공의 묘소 관리가 허술함을 알고 문회장이 현지 교육위원회에 적극 건의하여 성역화 했다.

뿐만 아니라 이참평공의 동상을 그가 제작해서 일본에서 제일 큰 교토의 도자기촌 옆에 세웠다. 모두 문회장 자비로 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이참평공의 14대 후손이 그와 아직까지 교류를 해오고 있다.

일본에 가면 1700년전 백제 영암에서 일본에 건너가 일본 학문의 시조로 추앙받는 왕인박사의 비(碑)가 동경 우에노(上野)공원에 있다.

일본에서 공휴일인 11월 3일은 일본 문화의 날이면서 왕인박사 축제의 날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일본의 국민들이 모두 안다면 감히 한국을 침략하거나 감히 모독할 수가 없다. 그가 한일역사문화기행 자서전과 화보를 펴낸데 이어 일본어판을 만든 이유도 그런 때문이다.

그는 4년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그 후유증으로 아직도 몸이 불편하다. 지금 그가 몸이 불편하여 움직이지를 못하니까 그를 만나려면 모두들 집으로 찾아온다. 일본에서까지 지인들이 집으로 그를 만나러 찾아온다.

“투병생활하면서도 왕인박사 동상을 만들어놨어요. 책도 다 써놨고 동상만 제막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독립 운동하는 심정으로 살고 있어요. 이제 내가 할 문화사업은 다 했어요. 이제 나의 뜻을 이어받아서 누군가가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밑 빠진 독처럼 한없이 자기 돈이 들어가기만 해서 좋은 일이라고는 하지만 선뜻 나서줄 사람이 없다. 그게 안타깝다.

한일예술문화교류회 회장으로 38년째 활동하면서 고생도 많았지만 자부심도 크다.

임진왜란 때 와까야마현에 거주하는 사야가(沙也可)라는 일본인장수가 있었다. 동방의 군자나라 침공은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에 한국을 안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나고야성에 장수들의 부인을 다 잡아놓고 한국에 안 간다는 장수의 부인들을 다 죽이는 판국이어서 그는 어쩔수 없이 한국에 왔다.

조총을 만드는 기술자였던 사야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 장수로서 군자의 나라 한국을 침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한국에 와서는 3000명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군사와 함께 귀화를 했다.

사야가는 성을 김씨로 사사받아서 모화당이라는 벼슬도 받고 한국인으로 조총 제조 기술을 전수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전공을 많이 세웠다.

대구 달성구 녹동에 가면 사야가의 사당(鹿洞書院)이 있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매년 사야가의 친척들이 300~400명씩 한국 녹동서원으로 참배하러 온다.

전국에 새마을운동이 벌어질 때 흙담을 헐다가 사가와 장수가 만든 조총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원형 그대로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역사를 일본에 알려야 할 사명감을 가지고 일본어로 번역을 해서 책을 만들었다. 그 책이 오늘 출판돼서 그의 손에 들어왔다.

기자가 인터뷰를 하던 날 공교롭게도 그가 펴낸 한일역사문화기행 일본어판이 그의 집으로 배달되어 더욱 의미가 컸다.

그동안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한일예술문화교류회를 이끌어왔다는 그는 누군가가 그의 뒤를 이어 한중일 교류의 폭을 미주와 구주까지 확대하고 건실한 문화교류단체로 지속 성장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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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뉴스닷컴/ 김명수기자 people365@korea.com>
 
2012년 09월30일 14시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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