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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이사람](172) 외인부대 출신 홍성훈
 
김명수기자 기사입력  2001/08/27 [21:54]

[클릭이사람](172) 외인부대 출신 홍성훈

  ‘나는 야 파리의 외인부대원’. 프랑스 파리에서 20Km 떨어진 중소도시 ‘똑시’에서 살고 있는 외인부대 출신 홍성훈(53)씨를 어렵게 만났다.

한국인 부모의 자식으로 한국에서 태어난 토종 한국인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프랑스 국적을 가진 프랑스인이다.

한국 군대에서 육군하사관으로 제대하고 스페인 외인부대에 이어 세계최고의 정예부대로 통하는 프랑스 외인부대까지 거친 그의 인생 역정은 파란 만장하기 짝이 없다. 살아온 삶 자체를 그대로 옮겨 놓아도 이보다 더 흥미진진한 영화는 없을 것 같다.

70년초 그는 육군하사관 제대후 일자리를 찾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때 마침 친구 삼촌이 원양어선 탔다가 돌아와서 그 배를 타고 선원으로 나갔다. 그것이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을 줄이야…

그를 태운 배는 세계적 휴양지 스페인 라스팔마스로 갔다. 거기서 이탈리아배에 올라가 보니까 봉급이 10배나 많았다. 한국선장에게 돈많이 벌게 선원수첩을 돌려달라고 했더니 대뜸 하는 말이 미친놈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즉시 타고온 배에서 무단하선을 했다. 1개월 지나니까 한국회사에서 선원수첩과 비행기표를 주면서 한국에 가라고 했다.

선원수첩과 비행기표를 받아 가지고 공항 출국창구로 나가서 옆으로 돌아 다시 빠져 나와 그토록 원하던 배를 탔다. 돈벌 욕심에 귀국을 안하고 불법체류를 한 것이다. 영사관에서 난리가 났다.

그는 이탈리아배를 타고 1년반 정도를 선원으로 일했다. 다시 하선해서 카나리아 군도내 라스팔마스로 갔다.

영사관에서 잡아가려고 해서 추적을 피하려고 스페인 외인부대로 들어갔다. 그때가 76년. 재미있는 일도 많았지만 괴로운 일도 많았다.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아 근무하기 힘들었다. 사고처서 영창까지 살았다.

14개월만에 휴가받고 나와서 부대로 안들어가고 이탈리아배를 탔다. 돈 떨어지면 배를 타고 돈이 모이면 하선해서 바닥 날 때까지 왕창 쓰고 빈 주머니가 되면 또 승선하기를 반복했다. 미치도록 고향이 그리워서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 보니 그런 식으로 승선과 하선을 반복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던 79년 11월 아파트에서 방황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스페인 경찰과 한국영사관 직원의 불심검문에 잡혀서 그는 불법체류 혐의로 5년간 강제추방 되고 만다.

라스팔마스 영창에서 수갑이 채워진채로 마드리드까지 압송 당했고 거기서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마침 파리에서 한국행 여객기를 갈아타는 과정에 8시간의 시간여유가 있었다.

그때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회사 직원이 가지고 있던 선원수첩을 공해상에서 건네받았다. 수첩을 열어보니 강제송환이라고 적혀 있고 그 위에 직인이 꽝 찍힌 여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순간 이렇게 끌려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서 서울행 비행기가 출발하기까지는 8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호텔로 갔더니 회사직원이 양주를 사왔다. 이유인즉 그를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게 해서 서울까지 무사히 데리고 갈 속셈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반대였다. 그를 취하게 하려고 주고 받다보니 그는 멀쩡하고 오히려 회사직원이 먼저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그날 새벽에 한여름 복장으로 그는 호텔에서 나왔다. 초겨울에 한여름 복장으로 호텔에서 나오는 순간이 바로 탈출순간이었다.

온몸에 한기를 느끼며 새벽 4시에 나와서 목적지 없이 계속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다.

당시 프랑스 말을 전혀 몰랐던 그는 스페인 말을 할 줄 아는 프랑스인을 극적으로 만났다. 그분의 도움으로 외인부대에 가게 되었다. 귀국하면 영창가니까 마지막 갈수 있는 것은 외인부대 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외인부대는 지구상에서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도피처였다.

마르세이유 옆에 위치한 ‘오바뉴’로 가서 초정밀 신체검사 받고 신상명세서를 작성했다. 신상명세서를 속이거나 숨기지 말고 있는 사실 그대로 써야 나중에 불이익이 없다는 말에 솔직하게 적었다. 만약에 나중에라도 속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프랑스에서 사는 한 평생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한국에서 하사관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을 했는데 프랑스 말을 전혀 못한다고 신상명세서에 이실직고했다. 그러니 4개월 훈련받고 그가 있을 만 하면 남아 있고, 만약 그때 가서 나가기를 원하면 미련없이 내보내 달라고 기록했다.

79년 11월 30살의 나이로 그렇게 그는 외인부대원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훈련을 받아보니 낙오는 커녕 펄펄 날았다. 사격 1등, 각개전투 1등. 관물정돈도 부대내의 모범이 될 정도로 똑소리나게 잘했다.

4개월 신병훈련마칠 때 실력으로는 1등을 했지만 프랑스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2등 졸업. 성적순으로 5등까지는 원하는 근무지로 보내주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런데 그만은 예외였다.

이유를 알고보니 훈련소대장이 그를 데리고 있으려고 일부러 원하는 근무지로 보내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처음 약속대로 사회로 내보내달라고 했지만 그것도 거절당하고 만다.

소대장이 똑소리 나게 잘하는 그를 데리고 있을 욕심으로 엉뚱한 곳으로 보내주었다. 그곳은 바로 소대장이 발령 받을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탈령을 했다. 그리고는 몰래 배를 탔다.

그러나 붙잡히고 만다.

영창 18개월을 살고 군사재판까지 받았다. 영창생활을 하면서도 부대에서 빠져 나오려고 사고를 많이 치니까 특수감방으로 보내졌다. 국제 골통들만 있는 특수감방.

하지만 그는 기를 쓰고 사고를 쳤다. 힘센 상사들이고 누구고 닥치는 대로 싸우고 주먹을 휘둘렀다. 외인부대 측에서도 그를 내보내 주지 않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다.

부대 영창 2개월이 넘으면 바로 사회영창으로 넘어간다. 부대에서는 그것을 피하려고 영창 2개월째가 되면 어김없이 하루를 외박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영창생활을 하고 또 2개월째가 되면 하루를 외박으로 내보내는 식으로 18개월을 채웠다. 그만큼 그는 외인부대에서도 능력이 뛰어난 대원이었다.

“내가 내몸 하나도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 자체가 화가 나서 견딜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차라리 그럴바엔 부대를 나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툭하면 싸움질이나 하고 사고를 쳤지요. 지금 생각해도 무서울게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18개월 영창생활을 마치고 82년에 다시 외인부대로 돌아왔다. 영창에서도 가장 혹독한 특수감방에서 생활했던 그는 외인부대에서도 가장 혹독하기로 악명 높은 곳에서 근무했다.

그러던중 83년 레바논사태가 터지자 현지에 투입될 유엔군으로 뽑혔다. 그러나 120mm 박격포 포신을 둘러메고 뛰는 훈련을 받다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전장에 투입되지도 못하고 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받고는 외인부대원에 들어간지 4년8개월만에 제대했다.

외인부대는 복무만기가 원래 5년인데 그는 허리를 다치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두달 먼저 제대를 한 것이다. 그때가 84년.

제대후 갈곳이 없어서 한때 마르세이유 스탠드바에서 일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외인부대원으로 근무하던 남미 프랑스 해외령 가이아나로 가서 개인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인공위성기지가 있는 가이아나에서 86년부터 90년까지 택시를 몰았다. 여동생의 소개로 알게 된 한국인 여성과 90년 정식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두었다. 파리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오는 9월이면 3학년에 올라간다.

후배가 파리에서 봉제공장을 하는데 같이 하자고 해서 90년에 택시를 그만두고 파리로 왔다. 그러나 성격이 안 맞아서 봉제공장을 그만두고 나와 덤핑옷을 사가지고 큰차에 실어 몰고 다니면서 팔았다. 장사가 잘됐다.

그런데 그만 덤핑옷 판매 2년만에 몽땅 도둑 맞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하필이면 아들이 태어나던 해였다.

그때 아내의 고생이 많았다. 고생하는 아내를 더 이상 두고 볼수 없어서 그는 다시 소규모로 덤핑옷 장사를 했다. 6개월만에 때려치우고 96년부터 파리에서 현지 관광 가이드로 활동하고 있다.

돈이 조금 모여서 파리 똑시에 작은 아파트도 한채 구입하고 지금까지 가족과 함께 오손도손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 아들은 프랑스에서 일주일에 하루는 꼭 한글학교에 나가서 한국을 배운다.

이번 한국관광은 3개월짜리 무비자 입국. 한국말을 배우게 하려고 9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왔다. 다행스럽게 한국에 온지 한달만에 아들은 한국말이 부쩍 늘었다.

프랑스에서 그는 79년부터 22년째 살고 있다. 스페인에서 75년부터 79년까지 살았으니 그의 외국생활을 모두 합치면 자그마치 26년.

프랑스 외인부대원중에서 한국인으로는 그가 두 번째로 알고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 외인부대를 모두 거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고 한다.

현재 키 177Cm, 몸무게 90Kg. 그러나 외인부대시절에는 몸이 쭉 빠진 날쌘돌이 근육질이었다. 지금도 50이 넘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차돌맹이같이 단단해 보인다.

그가 느낀 스페인 외인부대는 억압이고 프랑스 외인부대는 자유 그 자체였다. 그의 말을 빌리면 프랑스 외인부대는 근무시간 끝나면 완전 자유인이다. 점호도 물론 있다.

그리고 외인부대라고 해서 거창한 훈련 목적이나 이유도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훈련이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 나가면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싸우라는 것이다. 내가 안 죽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그래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런 훈련 덕택인지 사회에서 술타령에 빌빌거리던 사람도 일단 외인부대원이 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너무 이질적인 사람들이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일 정도로 세계 각국에서 온 대원들이지만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훈련받은 만큼 강해진다. 훈련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의 소유자가 된다.

외인부대출신으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모든 공을 죽은 사람에게 다 넘긴다고 한다. 불꽃처럼 산화한 동료를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보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외인부대출신이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그는 외인부대에서 자기자신을 지키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한국사람의 근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지금은 비록 고국을 떠나 파리에서 프랑스인으로 살고 있지만 뿌리는 한국인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살고 있다.

소설보다 더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홍성훈. 그가 외인부대에서 얻은 가장 큰 재산은 외인부대출신이라는 자부심과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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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1/08/27 [21:54]  최종편집: ⓒ 인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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